오두인(吳斗寅)과 추미애
오두인(吳斗寅)과 추미애
  • The Assembly
  • 승인 2020.09.1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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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인(吳斗寅)과 추미애

 

조선 숙종때의 일이다.

장희빈에 눈이 먼 숙종은 멀쩡한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중전의 자리에서 내쫓았다. 조선 왕조 5백년 사상 처음 있던 일이다.

왜 그랬을까? 장희빈이 아들을 낳은 데 따른 숙종의 통 큰 보상이었을까. 중전이 자식을 낳지 못했으니, 이런 짐작도 가능하다.

당시 조정안은 뒤숭숭했다. 송시열(宋時烈)로 대표되는 서인(西人)세력이 물러나고 남인(南人)들로 물갈이되던 때였다. 역사에선 이를 가리켜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부른다.

이런 격동 속에 인현황후는 애꿎은 희생양이 됐고, 거유(巨儒) 우암(尤菴. 송시열의 호)도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나라의 불행이자 크나큰 손실이었다.

숙종 15년 기사년, 그러니까 1689년에 벌어졌던 일이다.

임금의 이 같은 변덕스런 노기(怒氣)에 조정은 두려움에 입을 다물었고, 민심은 흉흉했다. 바로 이 해 봄 형조판서에 제수됐다가 물러나 칩거 중이던 오두인(吳斗寅)은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는 숙종의 광기(狂氣)에 분연히 맞섰다.

눈물로 앞을 막아선 집안 식구들과 주변의 간곡한 만류마저 뒤로한 채 대궐로 달려갔다. 66세의 고령에다 외직인 평안도 관찰사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몸은 많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참판 이세화(李世華),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 80여 명의 의기(義氣)있는 신하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들은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는 군왕(君王)의 불의(不義)함을 성토하며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극도로 화가 치민 숙종은 몸소 노()대신 오두인과 박태보, 이세화에게 친국(親鞫)을 가했다. 사정없는 곤장세례 속에 이들 3명은 초주검이 된 채 귀양길에 올랐다.

유배지인 의주(義州)로 향하던 오두인은 장독이 퍼져 파주(坡州)에서 숨을 거뒀고, 박태보 역시 노량진에서 아까운 삶을 마감했다. 귀양을 떠나던 날, 이들이 지나는 신작로엔 수많은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충신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전송했다고 한다.

역사책인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실린, 오두인에 대한 인물평은 대략 이렇다. "양곡(陽谷.오두인의 호)은 임금의 부당한 처사엔 주저 없이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기개 있는 선비였고, 녹봉 외엔 실오라기 하나 탐하지 않을 정도로 청렴한 신하였다." 이게 왕조시대였던 조선 '형판(刑判.형조판서의 약칭)'의 품격이다(형조판서는 오늘날의 법무장관에 해당됨).

그로부터 330여 년이 지난 오늘,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하는 대한민국에서 '실절(失節)''형판'을 마주해야 하는 한 어눌한 시골선비의 가슴은 마냥 답답하다.

요즘 아들의 군대생활 특혜문제를 둘러싼 추미애장관의 처신이 '형판'의 품격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기에 하는 말이다. 검찰개혁으로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지르더니, 아들의 군 생활 특혜시비로 기름까지 붓는가. 사과와 원칙의 사전적 의미마저 훼손하면서 억지와 궤변으로 국민과 맞서려고 하는가.

예로부터 국민의 마음이 모아지면 하늘도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 국민과 척을 지면 백전백패라는 얘기다.

추장관은 자의든 타의든 하루 빨리 풍파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양곡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추장관은 이미 사욕(私欲)에 마음이 가려 정직을 저버렸다.

정직은 망령되지 않고 항상 깨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가치다. 공직자에겐 늘 생명처럼 가슴에 품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그렇다면 추장관이 선택해야 할 해답은 이미 나와 있지 않은가.

혹여 제 글을 읽은 분 중에 누군가가 오두인과 추미애를 비교한 데 대해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짚었다고 핀잔을 준다면, 그 질책도 달게 받을 것이다.

*​구 범 회 (전 연합통신 초대 북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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