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나무의 숲, 그리고 섬
땅과 나무의 숲, 그리고 섬
  • The Assembly
  • 승인 2019.09.0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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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래호 직가
김래호 직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아마 하나의 기억일 것이다. 딱히, 이름 붙이지 못할 경험들을 안고 산다. 막연하나마, 어떤 원초적인 힘들- 더위, 추위, 아픔, 달콤함-이 떠오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 역시 기억된다. 그러나 동사나 명사는 전혀 기억되지 않는다. 어릴 적, 인간은 말이 존재치 않는 솔기 없는 경험을 산다. 말의 부재는, 모든 것이 끊김 없이 이어져 있음을 뜻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이해될 수 있는 이상적인 언어에 대한 최근의 희망은, 어쩌면 이 기억 없는 상태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 존 버거(2004),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어린 시절의 한때」, 김우룡 옮김, 42쪽.

아기의 애도baby’s condolences- 생후 8개월 무렵부터 영아들은 특유의 불안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잠들었던 녀석들은 눈만 뜨면 우는데 바로 엄마가 죽어서 사라졌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달래주어도 다시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여전히 운다. 그러다가 18개월을 넘어서면 잠시의 이별을 일상적인 일로 여기게 된다. 이 ‘애도와 이별’은 대체로 피아제의 인지발달론과 일치하는데 2세까지 ‘대상의 영속성’을 이해하는 시기다.

짜장, 우리는 이런 ‘경험’을 어느 때까지 회상할 수 있을까? 첫울음 그날의 해와 달, 일, 시간 곧 사주는 물론 날씨와 역사적 사건도 먼 훗날 알게 된다. 여기에 애척을 그친 조금 더 ‘성숙한 행동’ 역시 부모님에게 듣는다. 양친의 몸과 마음 꼭 절반씩 빌려 온 이승. 가족들의 웃음꽃으로 태어나, 역시 그만큼 내어주고, 회두리에 울음바다로 떠나는 사람들- 우리는 그것을 인생, 일생, 평생, 생애... 순우리말로는 한뉘라고 부른다. 이승과 저승 그 사이에서 저마다의 ‘그승’을 산다고 새겨왔다, 나는.

땅이 가진 생물량의 대부분, 적어도 지상에 노출된 거의 대부분은 나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의 표면적 특성이 나무의 성공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나무는 자신에게 의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의지할 줄 안다. 반면 우리는 오히려 세상을 복종시키고 우리의 입맛에 맞추려고 한다. 나무처럼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헌신하는 것, 자신 아닌 것들을 자신 너머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외부의 힘과 화합하며 이를 굴복시키려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삶을 더욱 안락하게 만드는 방법을 배운다. - 자크 타상(2019),『나무처럼 생각하기』, 구영옥역, 61쪽.

과연 나무들은 자신의 ‘헌신과 화합’을 인식하는 것일까? 앞선 존 버거John Berger(1926-2017)의 언술에 기대면 나무는 그야말로 ‘말의 부재’ 그 말 없음의 표상이다. 프랑스 국제농업개발연구센터의 선임연구원인 자크 타상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 많은 나무의 생각’을 연구해 문학과 철학을 통해 웅숭깊게 풀어냈다. 묶어보면 오늘날의 영장류는 자신들이 나무의 행성에 살았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려 불행해졌다며, 나무처럼 더불어 숲으로 살아가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주창한다.

개체성 강한 나무들이 어울려 사는 숲의 교향곡- 소설가 김훈은 에세「가까운 숲은 신성하다」의 첫 문장에서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며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라고 규정했다. 그렇다. 위험하고 불안한, 극도로 피로한 그 시대적 불행의 늪을 벗어나는 길은 숲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하여 맑고 깊고 서늘한 바람이 통하는 사회를 복원해야만 한다, 우리는.

영동09- 국토정보지리원의 이 지리좌표 근사값은 다음과 같다. 위도: 36도 11분 17.67초 / 경도: 127도 51분 10.08초 / 표고: 194.3m. 표지판에 따르면 이러한 통합기준점을 전국에 2-3km 간격으로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어디에서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고, 인근의 지리좌표를 얻을 수가 있다. 5년 전 귀향해 지은 일속산방 어중간- 국도 4호선 옆 공터에 자리한 측점의 번호가 바로 ‘U영동09’이다.

더덜없이 나이테 꼭 60개 새긴 내륙의 한 ‘나무’가 남해와 서해 그 섬으로 여름 원행을 했다. 북위 36도를 떠나 33도의 제주도, 34도의 신의도와 하의도에 다녀온 것이다. 194.3m 충북의 소백산맥 줄기에서 자생하던 그 수목은 꼭 10배인 1,947,269m의 한라산을 보았고, 인천 앞바다의 평균해수면보다 아래인 섬을 밟았다.

돌아보건대, 나는 내게 지루함과 영감, 분노와 사랑, 고뇌와 기쁨이 왜 필요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둠에 압도되는 절망의 시간 속에서조차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알겠다. 내가 한때 탄식했던 불운도 이제는 더 커다란 직조물에 엮인 튼튼한 실처럼 보인다. 그것이 없었다면 내 생의 직조물은 지금만큼 탄탄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단계에 다다르기 위해 조급해하느라 누리지 못한 충만함의 순간들은 이제 다시 상기되고 음미되어야 할 시간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두 배로 감사하게 되었다. - 파커 j. 파머(2018), 『모든 것의 가장 자리에서』「전주곡」, 15쪽.

모든 것의 가장자리인 섬- 섬의 15세기 고어는 ‘셤’인데 어원이 ‘서다’가 온당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깊고 푸른 바다에 홀로 서 있는 그 땅이 바로 ‘섬’이다. 그 섬에 사람처럼 나무도 서서 잔가지를 뻗어 해풍과 작열하는 햇빛을 나누고, 서로 위무하며 자라고 있었다. 나무는 자신의 높이 그만큼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사방으로 뻗는다 했던가? 높디높은 산에도 나무가 서 있었고, 그들의 영역 못 미친 염전에는 바닷물이 증발하고 있었다. 햇살 닮은 눈부시게 새하얀 소금의 땅이 그 섬에 있었다.

시간과 공간에 더해 삼간을 이루는 인간은 날줄과 씨줄의 피륙을 짜는 존재이다. 분명 촘촘한 부분은 슬프고 서럽던 시절이었고, 듬성듬성한 부분은 기쁨과 환호의 순간이었으리라. 그런 천들을 잇고 이어 솔기를 만들며 살아들 가는 터.

이제 맑고 서늘한 소슬바람이 부는 가을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때때로 일손을 멈추고 어떤 모양의 천을 만들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가을은 그런 사색과 반성하기 더없는 계절이다. 부디 이 땅에서 아름답고 튼실한 나무들 모인 숲처럼 안락하고 평온한 나날 이어가시길 비손합니다.
 

* 필자: 김래호 작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전 대전방송(TJB) 보도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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